브라티슬라바의 역사적 배경
18세기 말 브라티슬라바(당시 프레슈부르크라고 불림)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 및 문화 중심지였다. 이 도시는 다뉴브 강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와 가까워 지리적 위치 덕분에 다민족이 교차하는 허브가 되었다. 종교는 당시 사회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가톨릭의 지배적 위치가 특히 두드러졌다. 교회와 수도원이 도시 곳곳에 퍼져 있었고, 종탑은 단순한 시계 기능을 넘어 종교 의식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성 마르틴 대성당은 도시의 랜드마크로, 그 종탑은 구름 속으로 솟아올라 종교 축제와 공공 집회에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사건의 초점은 이 유명한 교회가 아니라 구시가지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종탑인 성 니콜라스 종탑이었다. 이 종탑은 중세에 세워졌으며, 구조가 간단하고 문헌 기록이 거의 없지만, 외진 위치와 높은 전망대 덕분에 '종탑의 유령'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계몽 운동의 이성적 사상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지만, 미신과 종교적 광신은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농촌과 도시 변두리에서는 악령, 저주, 신비한 의식에 대한 전설이 민간에서 전해졌다. 종탑은 인간과 신성한 것의 연결을 상징하며, 종종 신비로운 색채가 부여되었고, 초승달의 밤은 민간 신앙에서 초자연적 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시기로 여겨졌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은 사건의 신비성을 뒷받침하며, 범인의 심리적 동기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제공했다.
사건의 경과
“종탑의 유령” 사건은 1787년에서 1790년 사이에 발생했으며, 구체적인 시간은 기록이 없어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브라티슬라바 지방지와 교회 기록의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사건은 1787년 가을의 한 초승달 밤에 시작되었다. 그날 밤, 성 니콜라스 종탑에서 자정 무렵 갑자기 낮고 끊어진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는 일상적인 시계 소리와는 전혀 다른 리듬이었다. 다음 날 아침, 한 젊은 남성이 종탑 발치의 돌길에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머리에 심한 외상을 입고 몸이 뒤틀린 채로, 분명히 종탑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으로 보였다. 고인은 지역의 제빵사 수습생으로, 나이는 약 20세였으며, 자살 경향이 뚜렷하지 않았고, 몸에 다른 외상 흔적도 없었다.
처음에 당국은 이를 사고로 인한 추락사 또는 자살 사건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후 2년 동안 유사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매번 초승달의 밤에 종탑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울리고, 그 뒤에는 항상 한 사람이 종탑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피해자의 신원은 다양했으며, 수녀, 상인, 노숙자, 시청 직원 등 총 5명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깊은 밤에 종탑 발치에서 발견되었고, 추락 높이는 약 20~30미터로 치명적이었다. 부검 보고서(당시 '검시 기록'이라고 불림)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모두 명백한 싸움의 흔적이 없었지만, 일부 시체에서 미세한 밧줄 자국이나 손목의 멍이 발견되어, 추락 전에 잠시 구속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종소리의 이상은 사건의 핵심 수수께끼였다. 성 니콜라스 종탑의 종은 교회 관리자가 울리며, 일반적으로 특정 종교 축제나 매일 정해진 시간에만 사용된다. 초승달의 밤의 종소리는 허가 없이 울렸고, 리듬이 이상하여 마치 어떤 의식적인 타격처럼 들렸다. 목격자들은 종소리가 낮고 느리며, 불안한 리듬을 가지고 있어 어떤 사건을 호출하거나 선언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고 말했다. 종탑의 입구는 보통 잠겨 있었고, 내부의 좁은 나선형 계단은 꼭대기 전망대로 이어지며, 소수의 교회 관계자만이 열쇠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 발생 후 점검 결과, 자물쇠는 온전했으며, 강제로 열린 흔적이 없었고, 계단과 전망대에서도 명백한 발자국이나 외부 물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조사 및 사회 반응
사건 발생 후 브라티슬라바 시 당국과 교회는 신속하게 조사를 시작했다. 피해자의 신원이 다양하고 명백한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에, 당국은 처음에 이를 독립적인 사건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종소리의 규칙성과 추락의 반복적인 패턴은 대중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시민들은 '종탑의 유령'에 대한 전설을 퍼뜨리기 시작했으며, 어떤 이들은 종탑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믿었고, 어떤 이들은 이교도의 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했으며, 심지어 어떤 이들은 사건을 반합스부르크 비밀 결사와 연결짓기도 했다.
조사는 지방 치안관과 교회 대표가 공동으로 진행했다. 그들은 먼저 종탑의 관리인과 열쇠 소지자를 조사했지만, 모든 관련자는 불참 증명을 가지고 있었다. 기술 분석(18세기 기준)에 따르면, 종탑의 종줄과 타격 장치는 변경되지 않았으며, 기계적 고장의 가능성을 배제했다. 치안관은 초승달의 밤에 종탑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배치하려 했지만,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경비는 보통 자정 이후 철수했으며, 종소리와 추락 사건은 항상 깊은 밤에 발생하여 경비의 행동은 효과가 없었다.
사회 반응은 조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종교 단체는 사건을 죄에 대한 신의 처벌로 해석하며, 신앙과 참회의 강화를 촉구했다. 일부 시민들은 종탑을 철거할 것을 요구하며, 그것이 악의 상징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미신적인 심리가 지역 사회에 퍼졌고, 심지어 피해자들이 어떤 초자연적 힘에 '제물'로 바쳐졌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러한 공포는 일시적인 종교 부흥을 초래했으며, 교회 출석률이 급증했지만, 사회의 불안을 더욱 심화시켰다.
범인의 심리적 동기 추측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하여 범인의 신원과 동기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사건의 패턴과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범인은 미신적인 심리와 죽음에 대한 의식적인 집착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범죄 심리학의 관점에서 가능한 동기를 분석한 것이다:
첫째, 범인은 종교적 또는 미신적 관념의 강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초승달은 유럽 민간 신앙에서 종종 신비와 변화를 연관짓고, 종소리는 종교 의식의 상징으로서 범인에게 인간과 초자연적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여겨졌을 수 있다. 매번 사건 발생 전의 종소리는 범인이 어떤 자작 의식을 수행하고, 죽음을 통해 어떤 정신적 또는 초자연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은 범죄 심리학에서 '의식화 폭력'이라고 불리며, 강박적 성격이나 망상증을 가진 개인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둘째, 추락의 방식은 범인이 죽음에 대한 극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높은 곳에서의 추락을 살인 수단으로 선택함으로써, 치명성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강한 시각적 충격을 주었다. 피해자가 종탑에서 떨어지는 과정은 범인에게 '정화' 또는 '승화'의 상징으로 여겨졌을 수 있으며, 이는 종교적 제물의 의식적 죽음과 유사하다. 밧줄 자국과 멍의 흔적은 이러한 가설을 더욱 뒷받침한다: 범인은 피해자가 떨어지기 전에 잠시 통제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어떤 의식적 준비를 완료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피해자의 신원 무작위성은 범인의 비개인적 동기를 반영할 수 있다. 범인은 특정 사회 계층이나 성별을 선택하지 않고 무작위로 목표를 선택했으며, 이는 그의 행동이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심리적 충동에 의해 촉발되었음을 나타낸다. 범인은 종탑을 신성한 무대로 간주하고, 피해자는 의식의 필수 요소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미해결의 수수께끼와 역사적 의미
“종탑의 유령” 사건은 결국 증거 부족으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다. 1790년 이후 사건이 점차 중단되면서 대중의 관심은 다른 사회 문제로 옮겨갔고, 사건은 점차 잊혀졌다. 당시 브라티슬라바의 기록 관리가 느슨했기 때문에, 많은 원본 기록이 19세기 초의 전쟁 중에 분실되어 후세 연구자들이 완전한 진실을 복원하기 어려웠다. 성 니콜라스 종탑은 19세기 중반에 노후로 인해 철거되어 물증의 가능성을 더욱 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범죄 심리학과 역사 연구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이는 18세기 말 유럽 사회에서 이성과 미신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계몽 운동은 과학과 논리의 확산을 촉진했지만, 종교와 민간 신앙은 여전히 사람들의 행동, 특히 범죄 행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둘째, 사건은 종교 장소가 범죄의 상징적 공간으로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종탑은 세속과 신성을 연결하는 건축물로서, 범인이 심리적 충동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장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건의 미해결 성격은 의식화 폭력과 미신적 심리를 연구하는 귀중한 사례로 만들었다.
현대적 관점과 시사점
현대 범죄 심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종탑의 유령” 사건은 강박적 성격 장애나 종교적 망상증을 가진 연쇄 범죄자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범인의 의식적 행동, 정해진 시간의 선택, 종교 장소에 대한 편집증적 사용은 현대의 일부 연쇄 살인범 특성과 일치한다. 그러나 DNA 증거, 심리 프로파일링 기술 및 현대 수사 수단이 부족하여 18세기 조사는 범인의 심리 상태를 깊이 파고들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또한 종교 장소와 상징물이 범죄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종탑은 도시의 랜드마크로서, 그 신비성과 높이는 범인이 범죄를 저지르기에 이상적인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장소 선택은 범인이 권력과 통제에 대한 갈망을 반영하며, 피해자를 높은 곳에 두고 떨어뜨림으로써 심리적 만족을 얻으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